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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정진·장석준·정희용, 젊은 진보 논객 3명이 진단하는 차베스 열풍 ▣진행·정리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사진 곽윤섭 기자 kwak1027@hani.co.kr 선명한 반미 노선을 앞세우며 석유를 매개로 남미를 뛰어넘어 대안세계를 모색해가는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행보는 거침이 없어 보인다. 남미는 물론 유럽과 아시아·아프리카에서도 그의 이런 모습은 온갖 비난과 찬사를 동시에 부르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문제적 인간’이다. 세계는 왜 차베스의 정치 실험에 주목하는가? <한겨레21>은 젊은 진보 논객 3명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민주노동당 중앙위원인 김정진 변호사(제일합동법률사무소)와 장석준 진보정치연구소 연구기획국장, 정희용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미디어센터장이 3월14일 오후 한겨레신문사 4층 회의실에서 모여 차베스의 ‘길’에 대해 두 시간여 열띤 토론을 벌였다. 노무현에 실망하고 차베스에 열광하다 차베스 대통령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열풍’ 수준이다. =정희용 센터장(이하 정): 우리 사회에서 신자유주의의 폐해가 본격화한 지는 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몇 가지 대안모델에 대한 논의도 있었지만, 딱히 ‘이거다’ 하는 모델은 없었다. 사실 현실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진보 진영은 뚜렷한 대안모델이 없었다. 신자유주의의 공세를 어떻게 넘어설지에 대한 해답도 찾을 수 없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주의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도 거의 없었던 상황이다. 그런데 베네수엘라에선 신자유주의 물결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기간산업과 광물·에너지 산업 국유화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시장 중심이 아닌 사회적 연대를 중시하는 경제체제를 실험하고 있다. 정치적 측면에서도 풀뿌리 참여 민주주의를 대폭 도입하고 있다. 그 모델을 고스란히 받아들이자는 건 아니지만, 눈길이 가는 건 당연하다. =장석준 국장(이하 장):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분명하다. 차베스 대통령 취임 초만 해도 검색 사이트에서 ‘차베스’라는 검색어를 넣으면 권투 선수인 세자르 차베스에 대한 얘기만 나왔다.(웃음) 베네수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세계적 관심사다. 이른바 제3세계뿐 아니라 유럽 등 ‘제1세계’에서도 관심이 큰 것은 마찬가지다. 신자유주의에 맞선 대안을 말하는 이들은 많았지만, 정작 그 실체가 등장한 것은 베네수엘라 사례가 처음이다. 참여 민주주의가 실제 작동하는 정치 현실로 나타났다. 1970년대 초부터 초국적 자본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유린당해온 남미에서 그 대안이 현실화하고 있다. =김정진 변호사(이하 김): 차베스 대통령에 대해 한국에서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의 ‘반미 노선’ 때문에 관심이 높은 측면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선거운동 기간에 내걸었던 것과 달리, 취임 뒤 미국을 방문해 이른바 ‘수용소 발언’을 했다. 이라크 파병도 그렇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것도 지지자들조차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을 게다. 반면 차베스 대통령은 어렵사리 집권에 성공한 뒤에도 미국의 온갖 압력과 견제에 성공적으로 대처해나가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실망하던 이들이 차베스 대통령에게서 희망을 발견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한다. 차베스 정권을 ‘포퓰리즘’으로 규정하는 이들은 그가 민주주의 절차를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는데. =김: 베네수엘라에선 거리에서 국민들이 헌법 조문을 읽고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고 들었다. 물론 헌법에 어떻게 쓰였느냐와 이를 어떻게 집행하느냐 하는 문제는 별개다. 보수우파를 견제하기 위한 조처일 수는 있겠지만, 정세의 위급성과 긴박성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또 미국의 위협도 상당히 과장돼 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좋지 않은 결말로 흐를 가능성도 없지 않다. 앞으로 얼마나 이런 부분을 최소화하느냐에 차베스 정권의 방향과 운명이 걸려 있다고 본다. 민중 권력만 강조되지는 않았나 =정: 서구적 민주주의란 측면보다 남미의 현실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오랜 기득권을 합리적 내부 토론이나 사회적 여론 압박만으로 제어할 수 있었을까? 베네수엘라에선 국영기업조차 대부분 계약직이고, 노조간부 등을 중심으로 소수만 정규직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반차베스 활동에 동참한 것은 해고 위협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을 혁파하기 위해 취한 조처는 서구적 민주주의 관점에서 비판하기보다, 그 나라 상황에 따른 평가를 해야 한다고 본다. =장: 유럽에서도 그렇지만, 민주주의란 체제가 신자유주의의 물결 앞에서 사회적 버팀목 구실을 못하고 있다. 정치권도 노동계도 신자유주의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폐해가 심할수록 이런 현상이 극명해지는데, 베네수엘라가 그 극단적 사례다. 노동조합은 이미 ‘황색’으로 흐른 지 오래고, 사회주의 정당조차 함께 부패해갔다. 결국 조직되지 못한 다수의 빈곤 대중을 지도자를 중심으로 모아내서 상황을 돌파하는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차베스의 정치 실험이 국내에 알려질 때, 차베스란 탁월한 지도자와 민중 권력만을 강조하는 것은 걱정스럽다. 합법 정당이란 구조 없이 지도자와 대중이 직접 만날 때 오히려 효과적인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시각이 있는데,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시민사회가 정당과 자연스럽게 만나야 한다. 우리 상황과 비교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정: 차베스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베네수엘라에선 군부도 석유회사도 완전히 우파가 장악하고 있었다. 일간지 90%가 ‘반차베스’를 표방할 정도로 여론도 불리했다. 차베스 대통령은 이런 상황을 돌파하는 방식으로 국민투표를 활용했다. 투표를 하는 과정 자체가 베네수엘라의 향방에 대한 국민적 토론과 참여로 이어지면서, 집권 초기의 어려움을 이겨냈다. 국민의 자율성과 참여, 자치를 믿고 문제 해결 능력을 믿은 것이다. 권력을 실제로 국민들에게 내주고 운영할 수 있게 만들어줬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차베스 정권이 반미 외교를 펴며 이웃나라에 석유를 지원하는 것도 흘겨보는 이들이 많다. 차라리 국내 복지에나 쓰라는 비판인데. =정: 베네수엘라가 국제 원유 가격보다 싸거나 무상으로 지원하는 석유량은 하루 생산량의 8% 정도다. 쿠바나 볼리비아 같은 나라에 대해선 이른바 ‘남-남 무역’ 형태로 주고받기를 한다. 중미 국가들은 절대 빈곤 상황이기에 난방유를 공급해주는 건 인도주의적 차원의 문제다. 미국이란 절대 패권이 있음에도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걸을 수 있다면, 석유를 매개로 한 외교정책은 싼값으로 큰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햇볕정책에 대한 ‘퍼주기론’식 비판에 익숙해 있다 보니 그런 말이 나오는 것 같다. 석유를 매개로 남미 좌파 정부 통합 =장: 퍼줄 수도 있다고 본다.(웃음) 차베스 정권의 ‘석유외교’보다는 현재 석유산업을 통해 얻은 수익을 바탕으로 어떻게 미래지향적이고 친민중적인 산업구조를 만들어가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석유를 매개로 남미의 좌파 정부들을 통합해내고 있는 측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비용 대비 효과 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과거 좌파 정권 같은 경우는 외부적 압박 때문에 국내에서 진보적 정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는데, 차베스 정권은 오히려 외부의 위협을 기회로 만들어내고 있다고 본다. =김: 차베스 정권에 대해선 기간산업 국유화나 석유 지원, 그리고 반미 성향 정도만 알려져 있는데 경제정책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국제 유가가 오르면서 해마다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늘고 있다. 일련의 경제정책을 통해 살인적인 수준이던 인플레이션도 잡아냈다. 석유를 매개로 남미 통합과 대안적 경제블록을 만들어낼 수만 있다면, 하루 생산량의 8%를 쓰더라도 아깝지 않을 것 같다. 차베스 정권의 정치 실험에서 석유는 얼마나 중요한 수단인가? 만약 석유가 없다면 상황은 얼마나 달라질까? =장: 베네수엘라에 원유 자원은 분명 행운이다. 극명하게 대비되는 사례가 1970년대의 칠레다. 칠레의 구리와 베네수엘라의 석유는 두 나라의 산업구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비슷하다. 하지만 석유는 공급자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되는 반면, 구리는 수요자가 좌우하는 시장이다. 칠레의 아옌데 정권은 미국이란 수요자 때문에 정권이 붕괴됐지만, 베네수엘라에선 그 반대의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정: 지난 2004년 차베스 정권을 겨냥한 쿠데타와 자본 파업, 그리고 소환투표 등 ‘반혁명’ 활동이 잇따랐다. 차베스 정권은 이를 견뎌낸 뒤에야 국영 석유회사를 장악하고 국고로 활용할 수 있게 됐다. 이때부터 석유기금을 활용한 빈민지원사업도 시작했다. 2004년 중반까지만 해도 동원할 재원이 없어 수해가 났을 때는 복구를 위해 군대를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석유는 차베스 집권 이전까지만 해도 ‘기득권의 물리력’이었다. =김: 석유는 어떤 산업보다 국유화가 용이한 산업이란 특수성이 있다. 딱히 석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것이 가지는 엄청난 이점은 있다. 베네수엘라의 정치 실험이 증폭될 수 있었던 데는 석유자원의 힘이 크다고 생각한다. 차베스 정권의 정치 실험이 우리 사회에 주는 교훈이 있다면? =김: 한국은 동아시아에선 드물게 형식적 민주주의가 정착 단계에 있다. 하지만 지난 10년 이상 민중들의 삶은 별로 나아지지 않은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이 체제가 어떻게 귀결될지는 속단할 수 없다. 집권층의 ‘무능’으로 대표되는 이런 상황 때문에 포퓰리즘에 기반한 우익 독재가 나올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탈리아처럼 기업가 출신이 과두적 지배체제를 형성하고, 반대파는 존재함에도 사회적 변화는 없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차베스 정권은 이보다 훨씬 어려운 상황을 참여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돌파하고, 애초 주장한 일을 일부나마 실현해냈다. 어쩌면 우리 진보 진영에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이런 점이 아닐지…. 한국에 포퓰리즘 우익 독재 출현할 수도 =정: 21세기 들어 엘리트 독주시대가 세계적으로 저물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선 노무현 정권 들어 되레 강화됐다. 단적인 예가 한-미 FTA를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것이다. 국회도 관료집단도 이성적 토론을 못하고 있다. 소수 권력자와 핵심 관료 몇 명, 언론과 재벌들 사이에서 논의가 끝나고 국가 권력을 통해 집행되고 있다. 형식적 민주주의조차 완성됐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지금부터 민주주의의 완성으로 나아가야 한다. 차베스는 빈민층을 복지정책의 시혜 대상이 아니라 지배 집단보다 힘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믿고 밀어붙여 성과를 냈다. 그런 새로운 흐름에 주목해야 한다. =장: 차베스에게 ‘길’을 물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베네수엘라 국민에게 물어야 한다. 앞으로 성장해갈 베네수엘라 민중들에게 충분히 기대를 걸어봐도 좋겠다. 21세기 첫 번째 좌파의 실험인 베네수엘라 사례에는 자본에 대한 사회의 통제와 국가기구의 민주화, 참여 민주주의와 민중권력 강화, 그리고 한 나라의 국경을 뛰어넘는 실천 노력 등이 녹아 있다고 생각한다. ⓒ 한겨레(http://ww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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