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세력 다양성, 룰라 좌파확산 견제로 제동 가능성
지난 20일 실시된 파라과이 대선에서 좌파후보인 페르난도 루고 전 가톨릭 신부가 승리함에 따라 남미지역 내 좌파가 결속력을 강화할 수 있는 새로운 전기를 맞을 것으로 보인다.
루고 전 신부의 당선은 남미지역에서 가장 오랜 61년간의 장기집권을 이어온 파라과이 콜로라도당 우파정권의 퇴출을 의미하는 동시에 알바로 우리베 콜롬비아 대통령을 제외하고 주요 국가의 정상이 모두 좌파 출신 정치인으로 채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미지역의 대표 경제블록인 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의 경우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에 이어 파라과이에서도 좌파정권이 등장함에 따라 사실상 '좌파블록'이 됐다.
루고 당선인은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과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 타바레 바스케스 우루과이 대통령, 미첼 바첼레트 칠레 대통령,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 라파엘 코레아 에콰도르 대통령 등 좌파 정상들과 연대감을 강화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남미 좌파 3인방'을 주도하는 차베스 대통령이 조만간 루고 당선인과 회동을 추진하고 있고, 루고 당선인이 자신의 지지 기반인 '변화를 위한 애국동맹'(APC)이 "남미 좌파 활성화를 위한 새로운 꼭지점을 형성할 것"이라고 밝힌 사실은 향후 남미지역에서 또 다시 좌파 열풍이 거세게 불 것이라는 전망을 낳고 있다.
APC에는 군소 좌파정당과 사회단체 30여개가 참여하고 있어 앞으로 파라과이 정국운영 전반에 좌파의 기운을 불어넣는 것은 물론 남미지역 내 좌파정당과의 교감도 크게 넓혀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파라과이에서 이제 막 싹이 트고 있는 좌파정권이 남미지역 좌파 확산에 어느 정도나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우선 루고 당선에 사회주의운동당(PMAS) 등 좌파정당 외에도 최대 야당인 중도우파 급진자유당(PLRA)이 큰 힘을 보탰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원주민 단체 등 성격을 달리하는 사회단체도 상당수 참여하고 있다.
집권당이 될 APC가 이처럼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어 루고 당선인이 좌파에 충실한 이념을 마음껏 펼치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남미좌파의 영향력 확산 노력은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으로부터 가장 강력한 제동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룰라 대통령은 국제문제 전문가들과 언론이 파라과이에 좌파정권의 등장을 알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루고 당선인을 좌파 정치인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룰라 대통령은 특히 대선이 끝나자마자 대부분의 남미권 정상들이 루고 당선인에게 축하전화를 전한 것과는 달리 이튿날 오후까지 아무런 접촉을 갖지 않아 그 배경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여기에는 루고 당선인이 브라질-파라과이 간에 체결돼 있는 이타이푸(Itaipu) 조약 개정을 요구하겠다는 입장을 밝힌데 대한 불편한 심기가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군사독재정권 시절인 1973년 체결된 조약에 따라 브라질은 이타이푸 수력발전소에서 생산된 전력 가운데 파라과이에서 사용되지 않는 잉여전력을 헐값에 사들이고 있다.
루고 당선인은 브라질 정부가 전력 구입액을 현재 연간 3억 달러에서 15억~20억 달러로 높여야 하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룰라 대통령은 여전히 "이타이푸 조약 개정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룰라 대통령이 루고 정권 등장에 의구심을 품는 보다 큰 이유는 차베스-모랄레스-코레아로 이어지는 좌파연대 축의 확산 가능성 때문이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제시되고 있다.
좌파 출신이면서도 '우파보다 더 우파적인' 정책으로 다른 색깔을 보여온 룰라 대통령으로서는 좌파연대의 축이 남미대륙 심장부로 세를 넓히는 것을 내심 경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루고 당선인이 "집권하면 차베스 대통령과 룰라 대통령의 중간 노선을 추구할 것"이라고 밝힌 것도 룰라 대통령의 이 같은 의중을 반영한 것이라는 게 국제문제 전문가들의 견해다.
(상파울루=연합뉴스) 김재순 특파원 fidelis21c@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