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비평가 마르타 트라바(Marta Traba)는 20세기 라틴아메리카 현대미술을 논할 때 지정학적 위치와 역사, 경제 사회 여건에 따라 ‘열린 나라’와 ‘닫힌 나라’로 구분하고 있다. 유럽 문화에 대한 관계를 계속하고자 하는 부류와 유럽의 영향에서 벗어나 원주민 토착문화 속에서 그들만의 고유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양상들을 그렇게 분류한 것이다.
일찍부터 서양과 중남미의 무역중심지가 된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칠레, 브라질, 그리고 베네수엘라는 인종 분포에 있어서도 백인 중심의 사회였으며,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서 마치 스펀지처럼 유럽의 모더니즘 문화를 흡수했다. 반면에 내륙지방에 속한 페루, 과테말라, 볼리비아, 그리고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 국가들은 경제교역과 문화교류에서 뒤처졌다. 인구 구성에 있어서도 원주민과 혼혈인의 비율이 높다. 잉카나 아즈텍, 마야 문명의 후손이라는 자긍심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외부 문화 개방에도 폐쇄적일 수밖에 없었다. 훗날엔 식민지 정책으로 잃어버렸던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과거 우수했던 문화를 부흥하려는 인디헤니즘(Indigenism)과 연결되면서 유럽의 모더니즘을 모방하는 것에 대한 강한 거부로 나타났다.
급진적인 정치혁명으로 요동치던 멕시코에 비해 페루는 사회 개혁보다는 문화적 정체성을 추구하는 데 치중했다. 페루는 과거 잉카문명의 위엄을 통해 다른 민족과는 구분되는 인디오의 민족 단결을 유도했다. 인디오의 공동생활체인 아이유(Ayllu)를 모델로 삼고, 케추아(Quechua)어를 공통언어로 사용했다. 예술가들은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는 토착민의 생활과 모습들을 재현하였고 잉카의 민속예술에서 영감을 끌어냈다.
페루의 대표적인 화가 호세 사보갈(Jose Sabogal•1888∼1956)은 ‘우리는 인디언족에 대한 우리의 지지를 나타낸다’고 강조한 평론잡지 ‘아마투아(Amatua)’를 발행했다. 아마투아는 인디오말로 ‘현명한 사람 혹은 선생’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아마투아는 사보 같은 잡지였지만 예술과 문학의 아방가르드를 혁명적 정치와 명쾌하게 연결시켰다.
호세 사보갈은 멕시코 벽화운동에서 강한 인상을 받지만 인디헤니스모가 현대미술(모더니즘)과 연결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그는 페루의 관습이나 풍경 그림으로 당시 모스크바에서 유행했던 ‘국가주의’에 더 가깝게 접근했다. 그의 관심사는 유럽의 야수파나 입체파였다. 인디오를 다루었지만 깊이 파고들지 못하고 다소 피상적인 접근에 그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에 비해 페루 최초의 추상주의 작가 페르난도 데 시슬로(Fernando de Sizyszlo•83)는 인디오 문화에 관심을 갖고 원시주의와 아방가르드 결합에 선두 주자로 나섰다. 그는 건축을 공부했으나 후에 리마의 가톨릭대학 미술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비형식적인 기법을 통해 애매모호한 문자와 함께 잉카문명의 직조법을 이용한 매듭을 그림에 등장시켰다.
1960년대에 그는 잉카의 마지막 왕 아타우알파의 죽음을 소재로 13편의 연작을 제작했다. 기법이나 색감에서 고대문명의 정취가 흠뻑 묻어나고 있다. 잉카문명에서 유래한 직조 매듭, 의식용 제단 등을 연상시킨다. 시슬로가 1947년 건축가, 기업인, 지식인들이 규합해 만든 리마 갤러리는 현대미술 인스티튜트(Instituto de Arte Contemporaneo)로 발전하면서 미술시장을 형성하고, 국제전시를 유치하는 등 페루미술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갔다.
세계일보 안진옥 (갤러리 반디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