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파고스‘손님’들이 어질러놓은 ‘진화론 학습장’
[조선일보 2006-10-25 03:07]
21일 남미 적도 부근 에콰도르에서 서쪽으로 960㎞ 떨어진 태평양 해상. 쪽빛 하늘과 푸른 망망대해 사이 19개의 큰 섬과 200여 개의 작은 섬, 암초들로 이뤄진 갈라파고스 제도(諸島)는 말 그대로 ‘살아 숨 쉬는’ 생물의 낙원이었다.
갈라파고스 주도가 있는 산크리스토발 섬의 공항을 나서자, 이구아나가 먼저 ‘마중’을 나왔다. 이방인의 기척에도 겁내는 기색이라곤 없다. 170년 전 이곳에 온 찰스 다윈이 13종이나 되는 부리 모양을 보고 진화론을 떠올렸다는 핀치 새도 눈에 띈다. 해변에선 바다사자 무리가 일광욕을 즐기고, 하늘에선 검은 연미복을 차려 입은 듯 늘씬한 군함새가 사방에서 날고 있다. “이런 곳은 지구 다른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현지인 아르마스(52)씨의 말이 실감났다.
7만㎢ 해역에 흩어진 약 8010㎢ 넓이의 섬들은 에콰도르의 22번째 주이지만, 이 땅 주인은 야생 동식물이다. 수백만년 전 화산섬으로 태어난 후 오래 고립돼 있었던 데다, 한·난류가 교차하는 별난 환경 때문에 유독 진기한 종이 많다. 하지만 제대로 보호받기 시작한 것은 1959년 섬의 96.5%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다. 1978년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으로 지정한 후 1998년 특별보호법도 생겼다.
이 생물다양성의 보고(寶庫)는 지금 개발의 거센 외풍(外風)을 맞고 있다. 관광객 수가 연 12만명을 넘어서면서 당국은 비상이다. 생물학 석사 출신의 전문안내원 빌리 치키토(32)씨는 방문객들에게 “사람의 때는 절대 사절”이라며 “발자국 외에 아무것도 남겨서도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더 심각한 위협은 매년 늘어나는 이주민과 외부에서 들어오는 동식물·병균들이다. ‘무공해’ 환경이 소문을 타면서 주민 수(현재 2만명)는 연 10%씩 느는 추세다. 불법 이주민도 9000명을 넘었다. 외지인과 함께 들어오는 외부 생물은 토종을 멸종 위기로 내몰기도 한다. 이들에게 묻어 온 염소·개·고양이·돼지들이 야생화하면서 거북과 이구아나 알·새끼들을 해치고 둥지를 허무는 ‘천적’이 됐다.
이 탓에, 이곳 ‘지킴이’ 찰스다윈재단(CDF)은 토종들 보호·복원 작업에 눈코 뜰 새 없다. 두 번째로 큰 산타크루즈 섬에 자리잡은 이 연구소에서는 등에 번호를 매긴 코끼리거북 새끼들이 자라고 있다. ‘갈라파고스’란 지명도 이 섬에 많았던 거북 등이 말안장(갈라파고스) 같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지만, 지금은 연구소의 주요 복원 대상이 됐다. 이 연구소는 1997년부터 ‘지상 최대의 염소 퇴치 작전’인 ‘이사벨라 프로젝트’를 벌이고 있다. 연구소가 풀어놓은 염소 목에 추적장치를 달아 야생 염소 무리를 찾아가게 한 뒤 일망타진하는 방식이다. 그 결과 이사벨라 같은 큰 섬에 득실대던 염소 10만여 마리가 거의 사라졌다. 2003년 발트라 섬에서 시작한 ‘고양이 퇴치작전’에는 에콰도르 공군까지 동원됐다.
CDF의 섭외담당 로슬린 카메론씨는 “다윈은 ‘가장 힘센 종이나 머리가 좋은 종이 아니라 변화에 가장 적응을 잘하는 종이 살아남는다’고 했다”면서 “우리도 개발과 보존의 방식을 끊임없이 진화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갈라파고스 제도=전병근특파원 bkjeon@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