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시티 서울=연합뉴스) 이재림 특파원·권수현 기자 = 군부 독재 시절 제정된 헌법을 새로운 헌법으로 바꾸려던 남미 칠레의 계획이 작년에 이어 올해 또다시 국민투표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칠레 선거관리국(Servicio Electoral)은 17일(현지시간) 신헌법 제정 찬반 국민투표 개표 결과, 개표율 99% 기준 반대 55.75%, 찬성 44.25%로 각각 집계됐다고 밝혔다.
라테르세라와 엘메르쿠리오 등 현지 매체는 개표 추이로 볼 때 과반 찬성이 필요했던 개헌안은 부결됐다고 보도했다. 로이터통신도 선거관리국을 인용, "독재 시대 헌법을 대체하려던 보수 성향 헌법안을 칠레 국민이 거부했다"고 전했다.
이번 국민투표는 진보적 이념이 대거 반영된 헌법안이 지난해 부결된 이후 1년여 만의 재시도였다. 이번엔 보수 색채 짙은 조항들로 채워졌지만, 일부 논란 속에 결국 민심의 외면을 받았다.
해묵은 헌법을 갈아 치우자는 사회적 요구가 간헐적으로 분출된 가운데 2019년 10월 사회 불평등 항의 시위를 계기로 개헌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장이 마련됐다. '피노체트 군부 독재 헌법'이 불평등을 조장하고 성별·계층 간 차별을 해소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다.
2020년 국민투표에서 78%의 국민이 피노체트 헌법 폐기에 찬성한 이후 2021년 출범한 가브리엘 보리치 정부는 원주민과 무소속 등 진보적 성격의 인물로 꾸려진 제헌의회 헌법안을 지난해 9월 국민투표에 부쳤지만, 거센 반대(61.9%)에 부닥친 바 있다.
이후 올해 헌법 위원 선출을 위한 국민투표를 거쳐 우파 다수로 구성된 제헌의회 성격의 헌법위원회는 보수적 내용의 헌법안을 다시 만들어 정부에 전달했으나, 이 법안마저도 빛을 보지 못하게 됐다.
라테르세라와 엘메르쿠리오 등 현지 매체들은 지난해 진보파 법안이 충분한 여론 수렴 없이 급격한 사회 변화를 사실상 강제하는 내용으로 논란을 빚었다면, 올해 보수파 법안의 경우 사회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 채 과거로 퇴행하는 듯한 조문들 때문에 거부감을 불러왔다고 평가하고 있다.
낙태를 완전히 불법으로 규정할 수 있는 광범위한 태아 생명권 부여라든지 고액 자산가만 이득을 보는 주택보유세 폐지 등이 그 대표적 사례다. 원주민 공동체에 대한 언급이 완전히 빠진 것도 시민사회단체의 거센 반발을 불러온 바 있다.
이로써 좌파 성향의 보리치 대통령으로선 자신의 공약 중 하나였던 '피노체트 헌법 타파'를 임기 중 사실상 이뤄내지 못하게 됐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거푸 국민투표 부결이라는 현실을 마주한 상황에서 내년 지방선거와 2025년 대선 및 총선을 앞둔 점을 고려하면 재차 신헌법 제정 절차를 밟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보리치 대통령은 개헌안 부결이 확실시되자 이날 밤 대통령궁 연설에서 "이번 임기 동안의 헌법적 절차는 이로써 종결됐다"며 더는 개헌을 시도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개헌안은 지지하고 이번 개헌안에는 중립을 지켰던 보리치 대통령은 "두 개헌안 모두 칠레를 대표하거나 통합하지 못했으므로 우리나라는 현행 헌법을 계속 유지하게 됐다"면서 다른 시급한 현안에 집중하겠다고 덧붙였다.
우파 야당인 공화당의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 대표는 투표 결과에 대해 "우리는 개헌안이 현행 헌법보다 낫다고 국민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며 "정부와 좌파도 축하할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walde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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