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20년만의 정권교체..변화 요구 반영
2010.01.18 09:42
17일 실시된 칠레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는 중도우파 야당 모임인 '변화를 위한 연합'(코알리시온 포르 엘 캄비오.Coalicion por el Cambio ) 소속 세바스티안 피녜라(60) 후보의 승리로 끝났다.
기업인 출신의 피녜라 당선자는 대선 유세 기간 내내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유지한 끝에 지난달 13일 1차 투표에서 44.03%의 득표율로 1위를 기록하며 승리를 예고한 데 이어 이날 결선투표에서 마침내 대권을 거머쥐었다.
◇변화 요구 반영 = 피녜라 후보의 당선은 칠레 유권자들의 변화에 대한 열망이 반영된 결과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기독교민주당(PDC), 사회당(PS), 민주당(PPD), 급진사회민주당(PRSD) 등 4개 정당으로 이루어진 집권 중도좌파연합 '콘세르타시온'(Concertacion)은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전 대통령(1973~1990년 집권)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주의가 회복된 이래 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네 차례 연속 집권했다.
콘세르타시온은 칠레의 현대화와 민주주의 발전, 경제성장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퇴임을 3개월 앞둔 미첼 바첼레트 대통령의 지지율이 80%를 넘는다는 사실에서도 이 같은 평가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콘세르타시온의 집권이 20년째 이어져 오는 동안 칠레 유권자들의 염증도 쌓여갔다. 이번 대선에 1994~2000년 이미 집권했던 에두아르도 프레이(67) 전 대통령을 후보로 내세운 점도 신선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피녜라 당선자는 구시대 인물에 식상한 유권자들의 심리를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그는 "콘세르타시온이 칠레의 정치.경제.사회 발전을 이끈 것은 높이 평가하지만 이제는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며 지지를 호소했고, 이런 전략은 먹혀들었다.
콘세르타시온이 균열 현상을 보인 점도 패배 요인의 하나로 분석되고 있다.
1차 투표에서 20.13%의 득표율로 3위를 기록한 무소속 마르코 엔리케스-오미나미(36) 후보는 본래 콘세르타시온 소속이었으나 독자 출마를 강행했으며, 그의 무소속 출마는 곧 콘세르타시온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엔리케스-오미나미 후보가 결선투표를 앞두고 중도우파의 집권을 막는다는 명분 아래 프레이 후보 지지를 선언했으나 이미 때가 늦은 상태였다.
그가 1차 투표에서 20% 넘는 득표율을 기록했다는 사실은 콘세르타시온에도 변화를 강요할 것으로 보인다.
◇급격한 정책변화는 없을 듯 = 이번 대선에서 20년 만에 정권 교체가 이뤄졌지만 차기 칠레 정부의 정책이 급선회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견해다.
칠레 일간 라 테르세라(La Tercera)의 크리스티안 보필 부장은 "피녜라 후보가 당선됐지만 그동안 유지돼온 칠레 정치.경제 시스템에 극적인 변화가 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브라질리아 연방대학(UnB)의 비르질리오 아라이스 교수(역사학)도 "피녜라 당선자나 프레이 후보의 공약에 큰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사회.경제적으로 급한 변화가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피녜라 당선자는 일자리 100만개 창출, 민간투자 활성화, 마약 및 조직범죄 억제, 교육.보건 시스템 개선 등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필요할 경우 콘세르타시온과 정책협력을 강화하겠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의회가 여야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도 차기 정부 정책변화의 폭을 좁히는 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13일 대선과 함께 실시된 총선 결과 상원은 콘세르타시온 19석, 코알리시온 포르 엘 캄비오 16석, 무소속 3석으로 짜여졌다. 하원은 코알리시온 포르 엘 캄비오 58석, 콘세르타시온 57석, 기타 5석 등으로 구성됐다.
피녜라 당선자로서는 원활한 국정운영을 위해 야권과 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는 구도가 형성된 셈이다.
◇중남미 이념 지도 변화 영향 예상 = 피녜라 후보의 당선은 중남미 지역 이념 지도의 변화를 가속화하는 요인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국제문제 전문가들은 5년 전 중남미 지역에서 실시된 선거가 좌파 또는 중도좌파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으나 최근에는 (중도)우파의 부분적인 강세가 점쳐지고 있으며, 칠레 대선 결과가 이 같은 추세에 힘을 더할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바첼레트 대통령의 지지율이 80%를 넘는 상황에서 나온 피녜라의 당선은 남미 최대국 브라질에서 10월 실시되는 대선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브라질 역시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대통령의 지지율이 80%대를 기록하고 있으나 집권 노동자당(PT) 후보로 유력한 딜마 호우세피(여) 수석장관이 제1 야당인 브라질 사회민주당(PSDB) 예비후보 조제 세하 상파울루 주지사에게 여론조사에서 밀리고 있는 상황이다.
피녜라 후보의 당선으로 칠레와 볼리비아, 에콰도르, 베네수엘라, 파라과이 등 좌파정권들 간의 관계가 소원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들 좌파정권 국가들은 바첼레트 대통령 정부와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왔으나 피녜라 당선자와는 아무래도 코드를 맞추기 쉽지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러나 브라질과는 외교.경제적 협력 관계를 더욱 강화할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알바로 디아스 브라질리아 주재 칠레 대사는 프레이 당선자가 곧 룰라 대통령을 만날 것이라면서 2008년 말 현재 89억달러 수준인 양국간 교역 규모가 크게 늘어나고, 지역 현안을 둘러싼 협력도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상파울루=연합뉴스) 김재순 특파원 fidelis21c@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