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석유 시세가 연일 고공행진을 계속해 배럴당 100달러 시대를 예고하자 중남미 정상들이 새로운 관계개선을 모색하고 나섰다.
중남미 3인방으로 불리며 실질적으로 남미공동시장(Merco Sur)을 이끌어왔던 차베스(베네수엘라), 룰라(브라질), 키르츠네르(아르헨티나) 대통령들이 그간의 앙금을 청산하고 관계개선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3개국 대통령들은 한동안 볼리비아 가스 국유화 선언과 미국이 주도한 에탄올 프로젝트로 인해 대립구도를 형성해 왔었다.
그러나 유가가 연일 고공행진을 계속하자 상호협력을 위한 관계회복의 필요성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이런 분위기가 감지된 건 칠레에서 개최된 이베로-아메리카 정상회담장이었다. 스페인 국왕과 차베스의 설전으로 인해 외부에 잘 드러나지 않았으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경제관련 실무 장관들은 에너지자원 신규개발과 이에 따르는 소요자금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볼리비아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 차질없는 가스공급을 약속하고 지난 8월 브라질 국영석유 페트로브라스가 제출한 신규투자 계획서를 승인한다고 밝혔다.
또한 아르헨티나는 브라질이 보유한 심해석유 개발기술을 통해 남극 근해 해저석유 탐사 및 개발에 나서며, 베네수엘라는 에너지 개발사업에 우선적으로 자금을 투입한다는데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대표들은 에너지동맹을 통한 상호 윈-윈 전략을 장기적인 안목에서 추진하고 이를 위해 중남미의 자금줄 역할을 하게 될 남미은행(Banco del Sur) 창설이 우선돼야 한다는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지난 6월과 8월, 11월로 연기를 거듭하던 남미은행 창설선언을 12월 5일로 확정하자는 의견이 제시됐으나 베네수엘라와 아르헨티나가 난색을 표했다. 베네수엘라는 개헌 국민투표 일정과 겹치고 아르헨티나는 대통령 이취임식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아르헨티나 대통령 취임식 전야제와 동시에 남미은행창설을 선언하자는 절충안이 제시됐고 만장일치로 이 제안이 받아들여져 남미은행은 오는 12월 9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성대한 창설기념식을 가질 예정이다.
이날은 아르헨티나 대통령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중남미 정상들은 물론 유럽과 아시아, 북미정상 또는 대표들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집결, 남미 은행창설 이벤트가 자연스럽게 세계적인 조명을 받을 거라는 계산도 깔려있었다.
또한 퇴임을 앞두고 있는 중남미 3인방의 하나였던 아르헨티나의 네스토르 키르츠네르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 날 자신의 마지막 업적으로 남미은행 창설 선언과 은행 정관에 서명을 한다는 것도 고려됐다는 후문이다.
중남미 정상들이 에너지동맹을 통해 결속을 다지고 있다는 것은 오는 12월 10일 취임을 앞두고 있는 아르헨티나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츠네르 당선자의 최근 브라질 방문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룰라 브라질 대통령을 방문한 크리스티나 키르츠네르 여사의 표면적인 방문 목적은 양국간 통상확대와 무역대금결재시 자국통화 사용 문제 등이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 당선자가 이번 브라질 방문에서 심혈을 기울인 건 에너지개발에 관련된 브라질 국영석유 페트로브라스의 기술지원이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몇 년 전부터 아르헨티나 남부 해안의 심해유전 탐사 및 개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해외투자나 기술지원이 지지부진해짐에 따라 브라질의 심해 석유개발 기술지원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석유자원 고갈위기를 맞고 있는 아르헨티나로써는 새로운 유전개발이 발등의 불이었고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페트로브라스의 지원이 절실했던 것이다.
브라질 정부 역시 이런 아르헨티나의 접근이 싫지 않은 눈치다. 남미의 맹주 자리를 놓고 대립하기보다는 상호 협력을 통해 석유 및 천연가스 등 에너지 확보는 물론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아르헨티나의 지지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석유와 천연가스 등 에너지자원으로 인해 갈등과 부침을 계속하고 있는 중남미 정상들이 고유가 시대에 서민부담을 줄여주자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남미공동시장과 남미은행 등을 통해 다시금 결속을 다지고 있는 형국이다.
이른바 "중남미 에너지벨트"가 유가 100달러 시대를 맞아 서서히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얘기다.
김영길 / 프레시안 기획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