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중도좌파, 카스트로 건재 여부에 미묘한 견해차
차베스, `포스트 카스트로` 좌파 지도자 부상 전망
50년 가까이 쿠바를 통치해온 피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이 공식 사임을 발표하면서 지난 수년간 중남미 지역에서 바람을 일으켜온 좌파세력의 판도에도 변화가 올 것인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과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 라파엘 코레아 에콰도르 대통령, 다니엘 오르테가 니카라과 대통령 등 '카스트로의 친구들'로 불리는 중남미 좌파 지도자들은 카스트로의 사임 발표가 나온 뒤에도 곧바로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 등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이들의 짧은 침묵은 중도좌파로 분류되는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이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 미첼 바첼레트 칠레 대통령 등이 즉각 "외세의 개입 없는 쿠바 민주화"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한 것과도 대비됐다.
◇ 중남미권 "쿠바 권력이양 환영" = 중남미 국가들은 카스트로 의장의 사임 결정을 환영하면서 이를 쿠바가 평화로운 권력이양 절차를 밟기 시작한 신호로 받아들이고 있다.
룰라 대통령은 "지난달 쿠바를 방문했을 때 카스트로 의장이 순조로운 권력 이양을 준비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면서 카스트로 의장의 사임이 쿠바 정치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전망했다.
룰라 대통령은 특히 "향후 쿠바의 정치 일정에 미국이나 브라질 등 외부의 개입은 필요없으며, 쿠바 국민들이 스스로 더 좋은 체제를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 외세 개입 없이 민주화.개방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뜻을 나타냈다.
이어 카스트로의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 국방장관의 국정운영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브라질 방문을 요청할 것이라고 말해 '달라진' 쿠바와의 관계 정립을 위한 발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바첼레트 대통령은 "카스트로 의장의 사임은 쿠바가 한 시대를 끝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면서 "쿠바가 민주주의를 향한 새로운 지평을 향해 나아가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칠레는 쿠바의 국내 정치에 일체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룰라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외세 개입에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페르난데스 대통령과 아르헨티나 정부는 "카스트로 의장의 사임 발표는 충분히 예상됐던 일"이라면서 카스트로 의장이 쿠바의 정치 발전을 위해 훌륭한 결정을 내렸다는 점을 강조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카스트로 의장이 병석에 들기 전 마지막으로 방문한 국가가 아르헨티나라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쿠바 국민의 의사가 존중되는 평화적인 변화 과정을 지켜볼 것"이라고 말했다.
◇ 카스트로의 친구들 "그는 건재할 것" = '카스트로의 친구들'은 카스트로 의장의 사임 발표를 애써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분위기다.
차베스 대통령은 "나의 위대한 친구인 카스트로가 의장직을 떠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카스트로의 사임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차베스 대통령은 국영 TV와의 회견에서 "사임이 무슨 말인가? 카스트로 의장은 사임하지 않았다"면서 "카스트로 의장은 여전히 쿠바와 중남미 혁명을 위해 선두에 설 것"이라며 그의 건재를 확신하는 발언을 했다.
카스트로를 정치적 후견인이자 동지로 생각하고 있는 모랄레스 대통령은 "카스트로 의장의 사임 발표는 가슴 아픈 일"이라면서 "그는 쿠바와 중남미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라고 주장했다.
두 정상은 그러면서 '카스트로 없는 쿠바'와의 연대에 변함이 없을 것이라는 점을 누차 강조했다.
차베스 대통령은 "쿠바 혁명은 한 개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면서 "카스트로 의장은 모든 혁명가의 '아버지'이며 우리는 '카스트로의 아들들'"이라고 말해 쿠바와의 관계가 지속될 것이라고 확인했다. 모랄레스 대통령도 "카스트로 의장의 사임 발표와 관계없이 볼리비아-쿠바 우호관계는 계속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코레아 대통령과 오르테가 대통령의 입장은 즉각 전해지지 않았으나 카스트로 의장이 사임 발표에도 불구하고 당분간 영향력을 유지할 것이라는데 공감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중남미 좌파 연대의 축을 이루는 이들의 발언은 카스트로라는 정신적 지주가 사라지는데 대한 아쉬움과 함께 앞으로도 좌파 연대가 결속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우려감도 반영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카스트로 후계자 꿈꾸는 차베스 = 카스트로 의장이 권력의 전면에서 물러남에 따라 차베스 대통령이 중남미 좌파를 이끄는 '포스트 카스트로' 대표주자로 떠오를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중남미 정치 전문가들은 "카스트로 의장의 사임 발표는 차베스 대통령에게 '카스트로의 혁명 유산'을 이어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중남미 좌파 지도자로 부상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줄 것"이라는 견해를 나타냈다.
사회학자이자 작가이면서 차베스 자서전 발간에도 참여한 알베르토 바레라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카스트로의 자리를 이어받는 것은 차베스 대통령의 꿈이었으며, 차베스 대통령은 이 같은 입지를 구축하기 위해 주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차베스 대통령이 스스로를 '카스트로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자신이 카스트로의 혁명 이념을 물려받을 적장자라는 점을 과시하기 위한 의도에 따른 것이라는 설명이다. 차베스 대통령은 지난해 사회주의 혁명을 표방하는 개헌을 추진할 당시에도 카스트로 의장을 공개적으로 '아버지' '정치적 스승'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카스트로의 후계자가 되기 위한 차베스 대통령의 노력은 향후 베네수엘라-쿠바 관계 강화를 통해 나타날 것이라는 분석이다.
차베스 대통령이 막대한 오일달러를 앞세운 경제지원을 고리로 쿠바와의 일체감을 강화하는 방식을 통해 카스트로 사임으로 생긴 이념적 공백을 채우면서 중남미 좌파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굳히려는 시도를 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그러나 카스트로 의장에 이어 권력을 물려받을 것으로 보이는 동생 라울 카스트로 국방장관이 권력 기반을 굳히지 못한 상황에서 차베스 대통령이 자신의 야심을 지나치게 드러낼 경우 오히려 양국 관계가 서먹해지는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도 있다.
이와 함께 중남미 지역의 맏형을 자처하는 룰라 대통령이 견제에 나설 경우 차베스 대통령으로서는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상파울루=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