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베스가 反美외칠때 경제는 미국에 더 의존
[조선일보 2006-09-01 00:54:31]
현장 르포 ‘21세기 좌파혁명’ 베네수엘라를 가다 <하> 도심엔 美기업 간판 즐비… 맥도널드엔 손님 북적 100년간 무역 파트너… 작년 교역량 36% 늘어
[조선일보]
“자본주의는 인간성을 파멸시킨다.” “미국은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악이다.”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최근 중동·아시아 순방 도중 쏟아낸 말이다. 그의 반미·반자본주의 구호는 국내 현실과 얼마나 부합하는 것일까.
수도 카라카스를 둘러싼 산자락 중에서도 가장 높은 해발 2700m의 아빌라산. 정상으로 향하는 케이블카 안에서 도심을 바라보면 빌딩 숲 사이로 펩시·필립스·LG 등 외국기업들의 광고판이 즐비하다. 미국 상품 광고판이 특히 많다. 시내의 맥도널드는 점심시간이면 손님들로 북적댄다.
“100년간 베네수엘라와 미국은 무역 파트너였습니다. 그걸 하루아침에 쉽게 허물 수 있겠습니까?” 경제전문지 ‘베네코노미아’의 로베르트 보토미 편집장은 “이른바 좌파 혁명 이후에도 사정은 크게 변한 게 없다”고 했다. 밤이면 캘리포니아식 바에 미국 밴드의 록 음악이 흐르고, 대학생들은 할리우드 영화로 영어를 배운다. 사업가인 알바로 산체스(47)씨는 “주말이면 상당수가 1일 생활권인 미국 마이애미에 가서 쇼핑을 하고 오곤 한다”면서 “미국과는 멀어지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했다.
정상들 간의 험한 발언에도 불구하고 양국 교역량은 상향선을 긋고 있다. 유가 상승과 함께 지난해 양국 교역은 36% 늘어 404억달러를 기록했다. 베네수엘라에 대한 미국 GM의 자동차 수출도 지난해 28% 늘었다. 박찬길 카라카스 무역관장은 “차베스 정부는 반미 구호를 외치고 있지만, 최근까지도 이곳에 진출한 미국 기업들이 성공적으로 정부나 공기업의 입찰을 따내면서 베네수엘라 원유 달러를 다시 가져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반미 구호가 현실과 동떨어져 겉돌고 있다는 얘기다.
이곳 전문가들은 차베스의 반미감정이 개인적인 체험에서 유래한다고 해석한다. 유력 신문 ‘울티마스 노티시아스’의 엘레아사르 디아스 편집국장은 “2002년 4월 야당에 의한 쿠데타가 이틀도 안 돼 내분으로 실패로 돌아간 후, 대통령은 그 배후에 미국이 개입해 자신을 몰아내려고 했다고 믿게 됐다. 그 뒤로 그의 정책은 모두 반미를 필두로 입안되고 집행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차베스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미 중앙정보부(CIA)가 자신을 암살하거나 베네수엘라를 침공하려 한다고 주장한다. 최근 러시아산 전투기·헬기 구입을 결정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한 전문가는 “차베스 집권 이전 50여년간 군의 안보독트린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주변국과의 분쟁 대비였지만, 지난해 9월 국회를 통과한 신국가안보독트린(LOFAN)은 미국을 제1적국으로 규정했다”고 말했다. 베네수엘라의 국방비는 전년 15억5000만달러에서 올해 21억달러로 늘어났다.
차베스는 특히 국제무대에서 반미연대 구축에 적극적이다. 이란·시리아·벨로루시 등과 관계를 강화한 데 이어, 최근 중국과 급속히 가까워지고 있다. 하지만 지나친 정치적 야심이 국가경제에 해악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경제지 ‘베네코노미아’의 보토미 편집장은 “중국과의 에너지 협력을 두고 정부는 수출다변화라고 설명하지만 경제 논리로는 난센스이다. 주거래선인 미국까지의 수송료가 배럴당 2~3달러 선인 데 비해, 중국까지는 배럴당 11~13달러에 이르는 원거리 수송비용이 든다. 이 비용은 결국 국민 호주머니에서 나와야 한다”고 비판했다. 베네수엘라는 최근 친미우파 정권이 들어섰다는 이유로 멕시코·콜롬비아와 맺어온 G3 무역협정에서 탈퇴했다. 그 후 관세 부담으로 인한 국가경제의 주름살은 고스란히 서민들 몫이 됐다.
차베스는 아프리카나 중남미 국가는 물론, 심지어 미국의 빈민층에까지 ‘값싼 난방유’를 약속했다. 능력범위를 넘어서는 ‘시혜성 외교’로 국가경제의 주름만 깊어진다는 지적이 많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72%는 차베스의 ‘퍼주기 외교’에 반감을 나타냈다. 대통령의 잦은 외유도 도마에 오른다.
국제컨설팅회사의 한 변호사(45)는 “멕시코·콜롬비아가 자유무역협정 등으로 공업화에 박차를 가하는 데 비해 이 나라는 딴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서 “대통령이 국가발전 대신 반미 몰이에 골몰하고 있어 걱정”이라고 했다.
(전병근특파원 bkjeon@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