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망명 의사 급증'에 뿔난 쿠바 "쿠바 재능 훔쳐간다"
2015/12/21
'쿠바 의사 환영' 美 이민정책, 쿠바 반발로 존폐 기로
뛰어난 의료 시스템으로 정평이 난 쿠바의 의료 인력의 망명을 부추기던 미국의 이민 정책이 미국-쿠바 외교 정상화 이후 존폐의 갈림길에 놓였다.
쿠바의 반발을 미국이 마냥 무시할 수 없게 됐을 뿐만 아니라 쿠바를 벗어나 미국으로 향하는 쿠바 의료진 숫자가 올해 급증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이던 2006년 '쿠바 의료인 가(假) 입국 허가 프로그램'을 도입, 외국에 나가 있는 쿠바 의료 인력에 신속하게 비자를 내주는 정책을 도입했다.
무상 의료 교육을 시행하고 국민건강보험을 도입해 의료 수준을 높인 쿠바가 베네수엘라 등 개발도상국에 의료 인력을 수출하고 돈을 받는 '의료 외교'를 한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었다.
미국과 쿠바 법률 전문가인 미국 변호사 로버트 뮤즈는 20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와 인터뷰에서 이 정책을 "부시 행정부가 피우다 버려서 오바마 대통령이 치워야 하는 시가 꽁초"에 비유했다.
그는 "기술 인력의 망명을 좋아할 나라가 어디 있느냐"며 "정상적인 관계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쿠바는 지난달 말 미국과 한 이민 관련 회담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고, 외국에서 일하려는 의사들은 이달 7일부터 사전 허가를 받도록 규제를 강화했다.
쿠바는 "이 정책은 쿠바의 재능을 훔쳐가는 것으로 비난받아야 할 관행"이라는 주장을 이어오고 있다.
쿠바 의료진을 고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자발적인 길을 열어줬을 뿐이라는 것이 미국 정부의 입장이지만 지난 7월 정식 수교를 맺은 쿠바의 주장을 마냥 외면하기는 어렵게 됐다.
망명 의료진 숫자가 크게 늘고 있다는 점 역시 양국 모두의 부담이다.
2006년 이래 미국으로 넘어온 쿠바 의료진 7천여 명 중 1천663명이 2015 회계연도에 들어왔다. 전년보다 32% 급증한 수치다.
여기에 가짜 자격증을 가진 지원자가 적발되는 등 변수도 생기면서 통상 4∼6주 소요되던 비자 심사가 5개월까지 늘어난 사례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망명객 숫자 증가의 배경엔 척박한 쿠바 의사의 삶이 있다.
한 쿠바 의사는 2013년 미국으로 오기 전 쿠바에서 월급 25달러(약 2만9천원)를 받았다고 NYT에 말했다.
그는 그 돈으로는 나흘쯤 버틸 수 있었다며 "호텔 청소부 등 관광업 종사자들이 진료를 받고 주는 팁으로 연명했다. 매우 굴욕적이었다"고 몸서리쳤다.
쿠바 정부는 의사 월급을 지난해 70달러(약 8만2천원)로 올렸다.
외국으로 파견된 쿠바 의사들은 본국에서보다 돈을 더 벌었지만, 기형적인 구조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다.
베네수엘라로 파견됐다가 미국행을 택한 한 쿠바 의사는 베네수엘라에서 210달러(약 24만원)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그러나 "베네수엘라 정부가 내 노동의 대가로 쿠바에 매월 7천 달러(약 824만원)를 지급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현대판 노예였다"고 미국으로 가려는 결심을 굳힌 이유를 설명했다.
미국 땅을 밟는다고 해서 이들의 고생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마이애미에 정착한 한 의사는 자신의 쿠바 자격증이 인정되지 않자 간호사 공부를 하고 있다.
뉴저지 주에 자리 잡은 다른 의사는 시급 15달러(약 1만7천원)를 받으며 역시 간호사가 될 준비를 하고 있다.
모국 쿠바나 베네수엘라 같은 외국, 미국 중 어디에서도 직업에 걸맞은 대우를 받기 어려운 쿠바 의사들이라지만 이들의 미국행 열풍은 한동안 이어질 전망이다.
아바나에서 일하는 한 외과의는 NYT에 익명으로 "쿠바를 떠나지 않는 의사들은 비행기표를 살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김지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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