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비아 국민은 왜 평화협정 거부했나…반군·정권에 깊은 불신
2016/10/03
과거 반군공격 집중지역 반대표 많아…투표율 겨우 36.7%·5만8천여표차 부결
우리베 전 대통령이 이끄는 '우리벡시트'파 승리에 산토스 정권 '흔들'
반군 지도부 실형 면제 조항 쟁점…당장 군사적 충돌 재개는 없을 듯
일주일 전 세계 각국 명사들을 모아놓고 성대한 서명식까지 치른 콜롬비아 정부와 반군의 평화협정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됐다.
콜롬비아 국민은 2일(현지시간) 전국에서 치러진 정부와 최대 반군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의 평화협정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찬성 49.77%, 반대 50.22%로 부결을 선택했다.
앞서 최근 8차례 여론조사에선 거의 매번 찬성 의견이 20% 포인트가량의 격차로 우세해 무난한 가결이 예상됐던 것과는 판이한 결과다.
개표율 99.85% 기준으로 전체 유권자 3천489만9천945 명 중 1천280만2천81 명이 투표에 참가해 투표율 36.68%를 기록했으며 637만1천911 명이 찬성, 643만170 명이 반대 측에 섰다. 격차는 5만8천259 표였다.
콜롬비아는 최근 총선의 투표율이 40%를 기록하는 등 애초 투표율이 그리 높은 나라는 아니었지만, 관심이 집중된 이번 국민투표의 투표율이 더욱 낮게 나온 것은 예상 밖의 결과로 평가된다.
◇ 여론조사와 다른 결과는 'FARC 정책 강경파' 우리베 전 대통령의 승리
FARC에 의해 피해를 겪은 이들과 평화엔 찬성하되 현 정부의 협상 내용에 대한 불만을 가진 사람들의 반대 의견이 결국 평화협정을 부결시킨 것으로 보인다.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 인근 소도시에 거주하는 마리아 고르디요(26)는 "과거 FARC 게릴라가 가장 많이 공격하고 침투했던 아라우카, 메데인, 부카라망가 등 지역에서 반대표 비율이 매우 높았다고 한다"며 "평화 자체에 찬성하는 의견이 여론조사에, 이번 협정에 반대하는 의견이 국민투표에 반영된 것 같다"고 말했다.
전쟁 범죄를 자수한 FARC 조직원에게 실형을 면해주도록 한 평화협정의 조항이 가장 큰 변수였다.
국민투표에 대한 반대 캠페인을 주도해 온 알바로 우리베 전 대통령은 지속적으로 이 조항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FARC 피해자들의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FARC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해 온 우리베 전 대통령은 특히 자신이 대통령으로 재직할 때 국방부 장관을 맡아 FARC에 대한 군사 공격을 주관했던 '정치적 동지'인 후안 마누엘 산토스 현 대통령의 변심에도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지난 8월 스페인 최대 일간 '엘 파이스'는 "여전히 수백만 명의 지지를 받는 우리베 전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자산을 투자해 '콜롬비아 국민투표 판 브렉시트'(BREXIT)를 만들기로 결심했다"며 '우리벡시트'(Uribexit)의 가능성을 예언했는데 국민투표 부결로 현실화된 셈이다.
저조한 투표율과 찬성 측의 패배에는 지난달 30일부터 콜롬비아 북부 카리브 해 연안 지대를 강타한 태풍 '매슈'의 영향도 컸다.
태풍에 따른 폭우로 북부 일부 지역에선 80곳 넘는 투표소가 설치되지도 못한 가운데 투표율이 25% 정도로 극히 낮게 나왔다.
태풍이 강타한 카리브 해 연안 일대는 특히 평화협정에 대한 찬성 여론이 압도적으로 높은 지역이었기에 어쩌면 이번 투표에서 '캐스팅 보트'가 됐을 수도 있는 표들이 사라진 셈이다.
태풍의 영향을 우려한 정부는 투표 마감을 2시간 늦추자고 제안했으나 선거위원회가 이를 거부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국민투표가 부결됐다고 해서 정부군과 FARC의 유혈 분쟁이 즉각적으로 재개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FARC 협상단으로 나섰던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사다는 지난 6월 "반대 측이 이긴다고 평화 과정이 붕괴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런 고통스러운 전쟁을 계속할 법적 의무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또 FARC는 지난 1일 수류탄 등 620㎏ 분량의 폭약을 파괴하고 유엔의 확인을 받기까지 하는 등 이미 무장 해제 절차를 진행해오고 있었다.
정부군과 FARC의 충돌로 인한 사망자 숫자도 2014년 342명, 2015년 146명에서 올해 상반기 3명으로 확연한 감소 추세에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국민투표 통과 무산으로 인한 충돌 재개는 점치기 어렵다.
산토스 대통령도 패배가 확정되자 긴급 대국민 연설에서 "반대 측이 승리했다"고 인정하며 "이번 투표가 콜롬비아의 안정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 (FARC와의) 정전은 지속된다"고 못 박았다.
◇ 국민투표 밀어붙인 산토스 대통령과 평화협정 운명은
평화협정 발효를 위해 국민투표가 꼭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산토스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 생명을 걸고 추진한 평화협정에 최고 수준의 정통성을 부여하고 반대파의 목소리를 일거에 잠재울 카드로 국민투표를 강행했다.
국민투표는 평화 협상의 파트너인 FARC도 반대했던 사안이다.
산토스 대통령은 이번 평화협정의 반대파를 이끈 우리베 전 대통령 시절 국방부 장관으로 재직하며 우리베 전 대통령의 대(對) FARC 강경 노선에 동참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평화냐 대결이냐'가 화두였던 2010년 대통령 선거에서 평화를 주창하며 당선된 다음 2012년부터 FARC와 평화 협상을 진행, 한때 정치적 동지였던 우리베 전 대통령과는 척을 졌다.
다만 이번 국민투표는 평화협정에 대한 지지, 반대 여부는 물론 산토스 대통령에 대한 '중간 평가'의 성격도 띠면서 결국 산토스 대통령의 발목을 잡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FARC 피해자 보상, FARC 점령 토지 분배 등 첨예한 이해관계가 걸린 사안에 대해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으면서 잠재적 지지자들이 등을 돌렸다는 것이다. AP통신은 "산토스 대통령은 내전 종식에 직을 걸었다"며 "부결은 그에게 치명타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재로써는 정부와 FARC 사이에 재협상이 이뤄질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산토스 대통령은 개표 전 "내게 두 번째 계획은 없다. 반대 측이 승리하면 콜롬비아는 전쟁 상태로 복귀할 것"이라며 재협상 가능성을 배제하고 국민투표 가결에 총력을 쏟았다.
다만 국민투표가 반대 측의 승리로 끝남에 따라 우리베 전 대통령 등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재협상이 이뤄질 가능성은 남아 있다.
AP통신은 "반대파는 재협상을 주장해왔다"며 "특히 전쟁 범죄를 자백한 반군 지도부에 실형을 면해주는 조항에 대해 협상을 다시 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전했다.
FARC 지도자 로드리고 론도뇨(일명 티모첸코)는 "증오와 원한을 퍼뜨리는 자들의 파괴적인 힘이 콜롬비아인들의 여론에 영향을 미친 것이 유감"이라며 "FARC는 안정적인 평화 구축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보고타=연합뉴스) 김지헌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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