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콜롬비아 참전용사들 "양국 모두 평화 찾기를"
2016/10/06
백발 노병들 "통일 못 한 한국, 내전 중인 콜롬비아…평화로워졌으면"
"한국의 통일을 보는 것은 우리 모두의 꿈입니다. 내전 중인 콜롬비아가 그렇듯 아직 통일하지 못한 한국도 당장은 남과 북이 너무 다르지만 언젠가는 통일을 이룰 것이라 믿고 또 그렇게 됐으면 합니다."
콜롬비아 정부와 최대 반군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의 평화협정이 최종 가결 직전에 무산된 가운데 한국의 전쟁터에 청춘을 바친 콜롬비아의 노병들은 그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콜롬비아와 한국의 평화를 바랐다.
지난 3일(현지시간)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 자택에서 만난 한국전 참전장교 알프레도 포레로(86)는 "나는 전쟁의 비극을 안다"며 "같은 땅 위에서 모든 사람이 평화와 화해 속에 공존하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은 없다"고 강조했다.
포레로는 "1953년 3월 23일 불모 고지 전투에서 중국군이 전선 양 끝을 급습한 다음 측면을 지원하느라 텅 빈 우리 군 중심부 요새로 쳐들어와 육박전을 벌였다. 바로 옆에서 총검으로 서로 찌르고 찔리는 상황이었다"고 기억했다.
그는 "내가 한국전에서 돌아온 이후 콜롬비아는 내전에 빠졌다"며 "게릴라건 정부군이건 정말 많이 죽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죽음이 이 땅에 있었다"고 평생에 걸쳐 겪은 전쟁과 내전의 참상을 되돌아봤다.
1964년부터 FARC와 정부가 내전을 벌인 콜롬비아에선 지금까지 사망자 22만 명, 이재민 800만 명, 실종자 4만5천 명이 나왔다. 정부와 FARC는 지난달 평화협정을 발표하고 지난 2일 국민투표를 벌였으나 찬성 49.78%, 반대 50.21%로 부결됐다.
포레로는 "내전에 쓰인 돈이 엄청나다. 무기를 사는 대신 교육과 보건에 쓰일 수 있는 돈"이라며 "우리 늙은이들은 그러지 못했지만, 나의 손자와 증손자들은 지금보다 더 나은 나라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포레로는 22살이던 1952년 1월 한국에 도착해 1954년 7월까지 주둔했다. 콜롬비아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당시 소위였던 그는 한국전 휴전 조인 바로 전날인 1953년 7월 26일 기습을 받아 콜롬비아군 최후의 부상자가 됐다고 한다.
보고타의 한국전쟁 참전용사회(ASCOVE) 사무실에서 만난 한국전 참전용사 5명 또한 60년도 더 지난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면서 52년간 내전을 겪은 콜롬비아와 여전히 휴전 중인 한국의 평화를 기원했다.
한국전 당시 육군 일병으로 참전한 힐베르토 디아스(83)는 "인천을 거쳐 서울로 갔는데 완전히 폐허가 된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며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무엇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카를로스 라토레(82) 역시 "도착했을 때 한국은 한겨울이었는데 콜롬비아에는 그런 겨울이 없어서 얼어 죽는 줄 알았다"며 "캠프에서 동복을 받고 길로 나가니 피난민들이 보였다. 아기들이 아무것도 못 먹고 굶주려서 고통받는 모습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던 기억이 난다"고 떠올렸다.
당시 이등병이었던 호세 카스티야(82)는 "함께 파병 갔다가 외동아들이라는 이유로 다시 귀국하기로 한 병사가 있었다"며 "그 친구는 벙커에 대기하면서 아무 임무도 맡지 않았는데 조용한 밤에 잠시 벙커 밖으로 나갔다가 급습을 당해 즉사했다"고 떠올렸다.
카스티야는 "한국전에서 여러 차례 바로 옆에서 폭발물이 터지는 바람에 예전부터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며 상당히 큰 목소리로 말했다.
디아스는 "가장 치열했던 불모 고지 전투가 떠오른다"며 "산에서 작전하는데 계속 어디선가 다리 없는 사람, 팔 없는 사람, 죽은 사람들이 실려 왔다. 너무나도 무섭고 두려웠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장면"이라고 털어놨다.
1950년대에 10대와 20대를 지나던 이들이 어떤 거창한 사명감으로만 전쟁에 뛰어든 것은 아니었다.
현재 참전용사회 회장을 맡은 당시 병장 에피파미오 누녜스(87)는 "어린 마음에 어떤 새로운 것에 도전해보려고 했다"며 "아무 생각 없이 갔다"고 말했다.
페드로 베르가라(84)는 "사실 한국보다는 미국에 더 관심이 많았다. 많은 나라가 뭉쳐서 참전하는 전쟁이라 한국전에 참전함으로써 미국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기대가 있었다"고 웃었다.
라토레 역시 "나도 전쟁이 무엇인지 모르고 가벼운 마음으로 가겠다고 나섰다"고 거들면서 "막상 가서 몸소 전쟁을 체험하고 실감하니 전쟁은 최악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들은 한국전 참전용사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누녜스 회장은 "전쟁에 참가한 것에 나는 굉장한 자부심을 느낀다"며 "우리의 형제 국가가 자유를 지키는 과정에 공헌한 것에 대해 나는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베르가라 역시 "자원해서 참전한 것이라고는 해도 총성이 오가고 바로 옆에서 폭탄이 터지는 전투가 12일 연속으로 벌어질 때는 원망 아닌 원망도 했다"면서 "그러나 누녜스의 말처럼 한국의 토대에 공헌했다는 점이 자랑스럽다"고 힘줘 말했다.
최근 한국은 콜롬비아 국방부와 협력해 보고타에 콜롬비아 내전 등으로 인한 상이군경의 재활을 위해 '한국-콜롬비아 우호재활센터'를 완공했다.
앞으로 이 재활센터의 주된 수혜자는 내전 피해자들이 될 것이지만, 애초에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공헌이 없었더라면 쉽게 추진되지 않았을 프로젝트다.
누녜스 회장은 "우리가 한국전쟁에 참여한 결과로 이제는 한국이 우리나라에 이바지하고 있다"며 "참전용사들에겐 조금 늦은 감이 있기는 하나 재활이 필요한 수많은 콜롬비아인에게 좋은 일이 될 것"이라고 기뻐했다.
그는 또 "우리 콜롬비아인들은 지난 52년간의 내전에 지친 상태"라며 "국민투표 부결 또한 안정과 평화를 찾아가는 긴 여정 중의 하나다. 내전 중인 콜롬비아와 통일이 아직인 한국이 나란히 평화로워졌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보고타=연합뉴스) 김지헌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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