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BIZ] 돌아온 탕아, 중남미 경제
2010.10.04 10:47
권기수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미주팀장
세계 경제의 문제아에서 다크호스로…
2002년 6월 30일 한•일 월드컵 결승전. 브라질은 혼자 두 골을 넣은 공격수 호나우두의 활약으로 독일을 꺾고 5번째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브라질 전역에서 축제가 벌어져 브라질리아시(市)는 아예 하루를 임시공휴일로 선포했다. 하지만 축제는 오래가지 못했다. 불과 반년도 안된 그해 11월 브라질은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당시로서는 사상 최대 규모인 304억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았다. 1980년대 외채(外債) 위기, 1995년 멕시코 페소화 위기, 1999년과 2002년 브라질 경제 위기, 2001년 아르헨티나 디폴트(채무불이행)까지 중남미는 경제 위기의 단골 주연이자 문제아였다.
▲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상징인 높이38m의 예수상. AP
2008년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세계 경제가 혼란을 겪을 때 중남미 국가들의 국가 부도 위험도는 3배 이상 급등했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 중남미를 보는 세계의 시선은 180도 달라졌다. 중남미 경제는 지난 10년간 꾸준히 변신해 왔고, 그 진가를 이번 경제위기를 계기로 확실히 드러냈다.
지난 2분기 중남미 경제는 전분기 대비 9% 성장했다. 한국•중국•대만 등 아시아 신흥 국가의 평균 성장률(7.4%)보다도 높은 수치다. 1930년대 이후 사상 최악의 경제 침체로 불리는 지난해에 마이너스(-1.8%) 성장을 기록하긴 했지만, 금융기관들은 중남미 경제가 올 들어 5%대 성장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현재 브라질의 부도 위험도는 이탈리아나 스페인보다 낮다. 세계 경제의 문제아였던 중남미 경제가 세계 경제를 이끌 다크호스로 주목받고 있다.
■ 브라질•칠레•아르헨티나 善戰
멕시코를 포함한 라틴아메리카 국가와 카리브해 국가들을 통칭하는 중남미 경제권은 인구로 보면 5억6000만여명(2008년•세계은행)으로 유럽연합(EU•5억명)보다 크다. 전체 경제의 90% 이상을 브라질•칠레•아르헨티나•멕시코•콜롬비아•페루•베네수엘라 등 7개 국가가 차지하고 있다.
요즘 중남미 경제 성장을 이끌고 있는 나라는 브라질•칠레•아르헨티나 세 나라다. 미국 경제에 대한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낮아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피해가 작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2억 인구, 중남미 1위 경제 대국인 브라질 경제는 올 1•2분기 연속 전년 대비 9% 가까운 성장세를 보이며 중남미의 맏형 노릇을 하고 있다. JP모간은 올해 브라질 경제가 7.5% 성장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는데, 이는 1985년(7.9%) 이후 가장 높은 성장세다.
원동력은 내수 성장과 중국이다. 경제위기 와중에도 지난해 브라질의 가계소비는 전년 대비 4.1% 증가했다. 같은 해 브라질의 대(對)아시아 수출은 전년 대비 5.3% 증가했고, 이중 중국으로의 수출은 23% 급증했다. 당초 브라질의 최대 수출 상대국은 미국이었지만, 지난해 중국으로 바뀌었다.
경제가 가파르게 상승하자 연평균 10% 경제성장을 기록했던 '브라질의 기적 시대'(1968~73년)가 재현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칠레는 내수와 수출이 경제 성장을 이끌면서 올해뿐 아니라 내년에도 높은 성장을 거둘 것으로 예측된다. 아르헨티나는 이웃나라 브라질로의 곡물과 축산물 수출이 는 데 힘입어 2분기에 전년 동기 대비 11.8%의 초고속 성장을 기록했다.
중남미 경제 안에서도 온도 차는 있다. 대미 수출과 미국 거주 교포들의 해외 송금에 의존하고 있는 북중미권 경제는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전체 수출의 80%를 미국에 의존하는 멕시코 경제는 지난해 1995년 페소화 위기 이후 최악의 침체(-6.5% 성장)를 겪은 뒤 올해 4%대의 성장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 중남미 경제, 무엇이 바뀌었나
중남미가 경제위기의 주연이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었던 것은 위기에 대한 내성과 기초체력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미주개발은행(IDB)은 지난 3월 낸 보고서에서 중남미 전체를 위기로 몰고 갔던 1998년 롱텀캐피털(LTCM) 파산 당시와 최근의 중남미 경제를 비교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롱텀캐피털 위기 당시 경제 규모 대비 10%였던 외환보유고는 2008년 13.9%로 늘었다. 1998년에는 중남미 경제가 GDP 대비 2.6% 재정 적자를 기록했던 반면 2008년에는 0.9%의 흑자로 돌아섰다.
최근 10년간 중남미 국가들이 천연자원에 대한 세금을 늘린 것이 세수의 기초가 됐다. 1990년 칠레 중앙정부의 부채는 GDP의 76%였지만, 2008년엔 19%까지 낮아졌다.
이런 기초체력을 비축한 덕에 중남미 국가들은 경기 부양책 카드를 제때 쓸 수 있었고, 미국발 경제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멕시코•베네수엘라 등 일부 국가를 제외하곤 가계소비가 경제위기 와중에도 성장했다.
오는 10월 대선을 앞둔 브라질 경제는 금리 인상 등 출구 전략에도 불구하고, 인프라와 석유개발 등에 대한 대규모 투자에 힘입어 중남미 경제의 확실한 성장 엔진으로 부상할 전망이다. 8월 신정부가 출범한 콜롬비아 경제도 지속적인 시장친화적 경제정책에 힘입은 투자 환경 개선으로 4%대 성장세를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아르헨티나 경제는 대두(大豆) 등 농산물 생산 증가와 재정지출 확대, 주요 수출 대상국인 브라질 경제 성장세에 힘입어 회복세를 보일 전망이다. 다만 정치사회적 혼란에 따른 투자 부진으로 성장률은 3%에 그칠 것으로 보인다.
반면 베네수엘라 경제는 유가 상승과 재정지출 확대에도 불구하고 전력 부족과 내수 부진 및 민간 투자 부족으로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마이너스 성장세를 벗어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 낮은 투자•저축률 등 해결 과제
물론 중남미가 풀어야 할 과제도 삼바 행렬처럼 길게 줄을 서 있다. 우선 부진한 투자다. 중남미 경제가 앞으로도 5%대의 안정적 성장세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투자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중남미 경제의 투자는 2008년 GDP 대비 22.4%로 증가했지만, GDP 대비 35%를 넘는 중국이나 인도와 비교하면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 페루(25.6%)와 콜롬비아(25.1%) 등이 상대적으로 투자율이 높지만, 중남미 최대 경제국인 브라질의 경우 19%에 불과하다.
투자의 바탕이 되는 저축률도 낮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08년 브라질의 GDP 대비 저축률은 17%로 중국(54%)과 인도(38%)에 비해 턱없이 낮다. 돈을 모으지 않고 쓴 덕에 내수시장은 호황이었지만, 안정적인 성장세는 위협을 받게 되는 것이다.
환율도 복병이다. 선진국 경제의 부진 여파로 돈이 중남미 국가로 몰리면서 이들 나라의 화폐 가치가 치솟고 있고, 수출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지난 2년간 달러 대비 브라질 헤알(Real)화의 가치는 47%, 칠레 페소(Peso)화는 40% 급등했다.
중국•인도와 달리 수출이 원자재에 집중돼 있고, 정치적 불안과 빈부 격차를 비롯한 정치•사회적 변동성이 심하다는 점도 해결 과제다.
세계은행의 중남미 경제정책 책임자인 마르셀로 주갈(Giugale)은 '라틴 아메리카의 멋진 신세계'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세계 경제의 하강 압력이 중남미 경제 성장을 한동안 늦출 수는 있다. 하지만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중남미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이 건실해 보이고, 지평선 너머에 희망이 보인다"고 썼다.
최근 남미 관련 보고서들은 2014년 브라질 월드컵,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까지 남미 경제가 순항할 것으로 예상하기도 한다. 브라질 정부는 이번 달 대통령 선거가 끝나는 대로 공항 등 인프라에 막대한 돈을 투자해 경기 상승세를 이어갈 계획이다. 세계경제포럼의 국가 경쟁력 평가에서 브라질의 공항 서비스는 133개국 가운데 101위에 그쳤다.
브라질은 4년 뒤 월드컵을 치르면서 2002년 이후 12년 만의 월드컵 우승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의 진정한 수퍼파워'로의 등극까지 노리고 있다.
조선일보 박수찬 기자 soocha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