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값 폭탄 맞은 아르헨티나 "투기세력 음모"…브라질도 신음
2014.02.04 16:14
남미 경제 대국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경제 상황이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지난달 신흥국 금융 불안을 촉발한 아르헨티나의 경제 상황은 나아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국제 정유업체 로열더치셸은 3일(이하 현지시각) 휘발유 등 정유 제품의 아르헨티나 내 판매가격을 12% 올린다고 발표했다. 올 들어서만 두 번째 인상이다. 고물가와 고환율의 이중고를 앓는 아르헨티나 경제에 기름을 쏟아 부은 꼴이다.
이웃나라인 브라질도 휘청대고 있다. 헤알화값이 4개월 넘게 추락중인데도 지난 1월 무역수지는 사상 최악을 기록했다. 브라질 중앙은행은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해 경제 성장을 감수하면서까지 7차례 연속 금리를 인상했다. 하지만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연준)가 양적완화 축소에 나서면서 금리를 더 끌어올려야 할 처지에 놓였다.
◆ “페소화 가치 급락은 투기세력 음모”…스태그플레이션 위기
아르헨티나는 휘발유 같은 에너지 수입가격이 오르면서 치명적인 악순환에 빠져들고 있다. 수입 에너지 가격이 오를 경우 연쇄적인 물가 인상을 불러올 뿐 아니라, 유가 상승분을 정부가 대신 메워야 하는 탓에 재정 적자 규모도 더 늘어나게 된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내년 선거를 의식해 전기료 인상도 억제하고 있다. 경제 성장이 동력을 잃은 상황에서 물가만 천정부지로 치솟아 아르헨티나 경제는 이미 사실상 스태그플래이션(불황에 물가 상승)에 직면했다는 진단도 나온다.
벼랑 끝에 내몰린 아르헨티나 정부는 ‘투기 세력의 음모’를 탓하고 있다. 투기 세력으로 영국계 정유업체인 로열더치셸을 지목하며 이례적으로 지사장 실명까지 거론하고 나섰다. 현지 일간지 라나시온은 3일 호르헤 카피타니치 대통령실장(장관급)이 정례 브리핑에서 “셸의 가격 인상은 아르헨티나 경제를 해치려는 음모”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현지 일간지 더테라에 따르면, 지난달 27일에도 악셀 키시요프 경제장관이 로열더치셸 탓에 페소화 가치가 폭락했다고 비난하면서 양측 간에 격한 설전이 벌어졌다. 이날 키시요프 장관은 “24일 오후 12시 20분 전까지만 해도 페소화 환율은 7.2달러 선에서 거래됐는데, 셸이 갑작스럽게 8.4달러 선에서 350만달러(약 37억원) 규모의 달러 매수 주문을 넣었다”며 “일부 투기 세력들이 종말론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고 밝혔다.
달러화가 속수무책으로 빠져나가면서 외환 당국의 사정은 더 다급해지고 있다. 라나시온에 따르면, 키시요프 장관은 지난주 아르헨티나 은행협회 소속 은행들과 비공개회의를 갖고 해외에서 100억달러(약 10조 8440억원) 규모의 달러화를 조달해달라고 요청했다. 또 페소화 가치가 더 떨어질 것으로 기대하는 농가들이 농산물 수출을 미루자, 지난 3일 이들 농가들에게 벌금을 물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뾰족한 수가 없는 아르헨티나 정부를 바라보는 투자자들의 시각은 냉담하기만 하다. 신흥국 금융 불안의 단초가 된 페소화 환율은 지난 3일(현지시각) 달러 당 8.03페소에 거래를 마쳤다. 지난해 1월과 비교하면 통화 가치 하락폭은 61%에 이른다.
◆ 통화 긴축 브라질 무역적자 사상 최악…“서든스톱 고위험 국가”
고물가로 신음하는 브라질의 지난 1월 무역수지 적자 규모는 사상 최대 기록을 갈아치웠다. 현재 진행되는 브라질의 통화 긴축 정책과 맞물려 브라질 경제의 추락을 걱정하는 목소리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브라질 개발산업통산부는 3일 브라질의 무역수지가 40억5700만달러(약 4조4002억원) 적자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월간 기준으로 비교 가능한 통계가 작성된 1994년 이후 가장 큰 규모다. 예상 밖의 결과에 이날 국제금융시장에서 미 달러화 대비 헤알화 환율은 1% 하락한 2.437헤알에, 브라질 증시의 보베스파지수는 3.13% 급락한 4만6147에 거래를 마쳤다.
문제는 브라질이 경기 부양에 나설 카드가 많지 않다는 점이다. 브라질은 지난해 4월부터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해 7차례나 연속으로 금리를 3.25%포인트 인상하는 고육책을 택했다. 통상 금리를 올리면 경제 성장은 둔해질 수 밖에 없지만, 살인적인 물가부터 먼저 낮춰야한다는 판단에서다. 브라질 일간지 에스타도 데 상파울루는 경제 전문가들의 말을 빌려 브라질 중앙은행이 이번 달 말에도 기준금리를 0.5%포인트 더 올릴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하지만 브라질 경제가 물가 안정과 경제 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둘 다 놓칠 수 있다는 걱정이 고개를 들고 있다. 금리 인상이 좀체 물가 안정에 효과를 발휘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브라질의 물가상승률은 2003년 4월 이후 10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올랐다.
상황이 이쯤되자 지난달 초 국제신용평가사인 무디스는 연례 보고서에서 브라질이 국가부채를 줄이지 못할 경우 국가 신용등급을 낮추겠다고 경고했고, 국제투자은행인 모건스탠리는 지난 2일 브라질을 서든 스톱(sudden stop·대규모로 유입된 자금이 일시에 빠져나가는 현상)이 발생할 위험이 가장 큰 국가로 분류했다.
알베르토 라모스 골드만삭스 이코노미스트는 “브라질 정부가 환율로 물가를 잡을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하고, 가격 통제 정책도 포기해야 한다”며 “일련의 잘못된 정책들이 경제 지표 악화로 이어지고 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에 말했다.
조선일보 남민우 기자 nam@chosun.com